-미수(88세)스승의 회고록 을 읽고-
존경하는 김병희(金昞熙 )님 "미수옹 회고록"을 받아 보고 참으로 감격했습니다. 정독을 하긴 했습니다만 독후감을 쓴다는 것이, 마치 건방지게 서평을 하는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아, 쓰기가 두렵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옛말 생각도 나서 한동안 망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귀한 글을 읽고 묵묵부답하는 것도 무례라는 생각이 들어, 감히 변변치 못한 소감을 올릴까 합니다.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박사님, 홈페이지에 이 글을 올릴까 했으나,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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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金昞熙 ) 박사님의 미수옹 회고록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큰 행운이었다.
특히 김병희(金昞熙 ) 박사님은 존경하는 스승이고, 졸업한지 45년 만에 인터넷에서 고희(古稀7순) 제자와 졸수(卒壽 9순) 스승이 다시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도 흔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일기를 쓰던 습관이 있었지만 그 일기 쓰듯, 독후감을 쓸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 앞에 선 조그마한 개미 한 마리 모습이라 할까?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박사님의 회고록은 산 역사의 보고였다. 엄청난 진실과, 파묻혀 버릴 뻔했던 한 현대사의 귀한 사료에다, 수많은 분들의 실명이 수록된 살아있는 증언 앞에 그저 머리가 숙여 질 뿐이다.
박사님의 일본 구주제국대학 선배이셨던 안동혁 박사님과, 이두겸 공대 학장님한테서 그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막상 박사님의 회고록을 읽어 나가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서려지고 글을 쓰기가 두려워 질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학자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KIST를 설립할 수 있도록 진언하신 분으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무지에 그저 황송할 뿐이었고, 회고록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김 박사 님이야 말로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하신 팔당땜과 같으신 분이셨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팔당땜이 왜 중요한가? 수도권의 광역 상수원이 팔당땜이 아닌가?
그 물이 오염되면 모든 수도권 시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생명줄이기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국민소득 50 불이던 세계 최빈국에서 국민이 먹고 살아 갈 수 있는 생명줄이 무엇인가?
그 물줄기를 만드시고 슬기보따리와도 같은 팔당땜을 건설해서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박정희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맑은 물을 공급해 주신 분이 바로 김 박사님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슬기보따리! 고 박정희 대통령께선 오랜 세월 군대생활을 하시면서 국토 방위에만 힘쓰시다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시고, 대통령이 되긴 하셨지만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나!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오랜 학자로서의 경륜과 한국 과학의 현실, 세계의 동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인 지식과 학식의 슬기보따리, 김병희 박사님을, 박정희 대통령 바로 옆에 둘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의 축복이었다.
대구사범은 비범한 천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어찌 김 박사님과 박 대통령의 만남이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박대통령의 혜안이 김 박사님으로 하여금 슬기보따리라는 인재풀 팔당땜을 건설하게 하시고, 맑고 오염되지 않은 물 줄기를 경부고속도로로, 포항제철로, KIST로, 새마을 운동으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으로 흘러 보내시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게 한 것이라 본다.
이런 와중에 그 땜에 독약을 집어 넣으려던 자, 김 박사님을 죽이려던 자들도 있었지만, 우리의 자랑, 김 박사님의 관대하신 배려는 후일, 희곡 비몽사몽국 법정에서 그 악당들로 하여금 극형을 선고를 받게도 했지만. 사면의 은총을 받기도 한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었던가!
다음으로 놀란 것은 김 박사님은 수학자라기보다 애국자요, 지사이었다. 어린 나이에 적호소년단의 일원으로, 물탕에 지은 왜인들 휴게소를 파괴했다. "國語讀本"을 "日語讀本"으로 바꿔 버렸다. 일본 국기를 상징하는 히노마루 벹토오(도시락)를 던져 버렸다.
그러한 일들을 그 무서운 일제 치하에서 할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은 김 박사님의 어린 시절부터의 민족독립정신의 발로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나라 잃은 소년이었건만, 그 마음속에는 조국을 되잦아야 한다는 우국의 혼이 잠자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박사님 의 글을 읽으면, 사학자요, 한글학자요, 발명가이심에, 그분의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게 한다. 7~8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어난 일들이 마치 오늘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관여했던 친구, 스승, 친척, 정치인, 학자들이 긍정적인 일에는 모두 실명을 밝혀 후대에 그분들의 공적을 입증해 주시는 산 증인이 되어 주신 것이라든가, 후학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조명해 볼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라든가, 이러한 역사를 조명해 보면서 앞으로 진로를 제시까지 해 주신 것 등이 또한 감명을 주시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불가사의한 일은 회고록을 쓰실 때가 미수(88 세)이신데, 어떻게 그 많은 분들의 실명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물론 박사님이 개발하신 기억법이 비법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사님이 벌써 "기본좌표 기억법"을 60여 년 전에 발명하셨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공개를 하셨는데, 본인은 박사님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한국에는 참으로 학자로서의 양심도 도덕성도 없는 장사꾼들이 무슨 대단한 학자인양 나서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사님이 고증하신 "댕방", "고늘"에 대한 글을 누군가는 절취하는 짓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기억법도 똑같은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한 20연 년전에 한국 TV에서 방영하는 기억법에 대한 생방송이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 최초로 기적의 기억법을 창안하신 아무게 박사님을 소개한다 하고 단숨에 수십 단어를 외어 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김 박사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기본좌표 기억법"이었다.
그 아무게 박사란 분은 이미 옛날에 그 기억법을 우리 김 박사가 발명한 것을 몰랐단 말일까?
인하공대학장, 동국대학장, 시절에 겪었던 김병희 박사님의 억울한 증언을 들으면서 참으로 의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당시 예비역 장군이었던 백 모란 자가 무주 공산 인하공대를 집어 삼키러다 김 박사님의 제지로 실패했다는 사실은, 친구인 인하공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지금 홍익대학 교수인 임병호 박사한테서 들은 기억이 있었지만, 이 회고록을 읽고 보니 참으로 비몽사몽국 법정에서 극형에 처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들은 사실 비몽사몽국 법정에 가기 전에 대한민국 법정에서 중형을 받아야 했을 자들이라 생각된다.
회고록을 읽으면서 이승만 정권하에서 겪은 억울한 일을 생각하면 4.19혁명은 김 박사님에게는 더할 수 없는 통쾌 함을 느꼈을 것 같고, 당시 4.19혁명의 중심에 서 있었던 나는 그래도 박사님의 한을 푸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 보람을 느꼈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적도 있었지만 장기 집권에다 나이 많아 인의 장막 속에서 너무 많은 과오를 범했고, 부정의 난무와, 인권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일, 또한 많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귀중한 역사적인 사료가 될 것이다.
사실은 나의 아저씨 뻘되는 분도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잡혀간 후 어느날 밤 피투성이의 몸으로 돌아온 일이 있다. 사연인즉, 이승만 정권은 그를 재판도 없이 어느 산골짜기 구덩이에 처넣고 수십 명의 보도연맹원과 함께 집단 사살했는데, 운 좋게 총상만 입고 살아 남았다는 것이었다.
마구간 곡간에 숨어서 수개 월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인 의사 한분이 밤에만 비밀리에 와서 치료를 해준 일이 있고, 그 아저씨는 수년간 숨어 살다가 자수를 했고, 재판에서는 무협의 판결을 받았다. 아저씨는 보도연맹의 "보"자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5.16군사 혁명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배고픈 시절을 극복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김대중, 노무현, 빨갱이 추종자밖에 없을 것이다.
김병희 박사님의 일화 가운데, 김 박사님은 500 원짜리 점심를 드시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만났는데, 박 의장은 10 원짜리 우동에다 노란 무 서너 조각으로 점심을 드시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눈물나게 감동을 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현직 대통령이 수억 원짜리 호화 전용기를 구입하지 않나, 수십만 원짜리 옷걸이를 사지 않나!그리고 김대중 씨가 궁궐 같은 아방궁을 짖고 들어 앉아 있는 것에 비한다면, 누가 국민을 위한 대통령인가는 불문가지라 하겠다. 3~40 년 후를 내다 보시고, KIST를 설립한 것 하며, 박근혜 씨가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한 것도, 김 박사님의 그 슬기보따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오늘날 IT 강국을 벌써 내다 보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만년에 후학들을 위해 이화학사전을 편찬하신 것은 박사님의 찬란한 업적이 아닐 수 없고, 그 사전으로 인한 파급효과는 두고 두고 나타날 것이다.
과학하시는 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선물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회고록을 나는 가보로 간직하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값어치를 실감하게 해 주는 귀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희곡 비몽사몽국의 특별법정에서 원수들을 단죄하시고, 특별사면과 함께 가슴 깊이 엉어리진 한을 함께 푸시는 모습을 보면서 김 박사님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아무리 한이 맺혔다 해도 후대에까지 가저 가면서 부관참시하고 골육상쟁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컴퓨터란 것이 나와 우주문제를 계산하려면 무량대수(無量大數), 비몽사몽(非夢似夢)보다 더 큰 계수단위가 계속 나와야 할 것 같다. 교수님! 다음 단위는 병희판관(昞熙判管)으로 하시지요.
교수님!사모님과 함께 무병장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재롱 떠는 손주 손녀 녀석들 오래 오래 두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고희(古稀) 제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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