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분재 역사 700년 앞당겨 종주국 자리 되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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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분재 역사 700년 앞당겨 종주국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1935년에 발견된 무용총 벽화에는 당시 고구려 문화를 집대성한 보고이다 허나 그 많은 문화적인 유산을 검증하고 세계 학계에 알리지 않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사장시켜 버리고 다른 나라에 빼앗기고 마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어 전문 사학자도 아닌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 무용총 벽화에는 의상, 기마, 씨름, 춤, 닭, 정원, 연꽃, 분재, 수래, 등등 수많은 그림으로 가득하다 이곳에 있는 그림 인물 표정 모습 등에서 문화의 향기가 가득하고 그림하나 표정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데 이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너무 어수룩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을 30대에서부터 분재 취미에 빠져 40여 년간 분재를 키우고 있다 미국의 여러 분재 애호 가들에게 분재 역사를 소개 하다 보니 한국의 분재문화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의 분재역사는 고려 중기에 중국으 로부터 왔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허나 중국은 1972년에 장희 태자 묘에서 분재가 발견되자 말자 세계 분재 학계에 즉시 보고 해서 분재역사의 종주국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1935년 분재가 있는 무용총을 중국 장희 태자 묘보다 37년이나 먼저 발견하고도 그동안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무용총분재는 장희 태자묘의 분재 보다 최소 200년 이상 앞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동안 다른 나라에 빼앗기고 만 대표 적인 예를 살펴보자 금속활자 문화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대 초, 이미 고려 왕실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규보의 동국이상국)이 있고, 14세기 후반(1377년)에는 지방의 절에서까지 금속활자로 책(흥덕사,「직지」)을 찍었을 만큼 발전된 금속활자 인쇄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금속활자 인쇄술의 최초라 하고 있는 독일은 한국의 기술을 전수받아 78년 늦은 1455년에 구텐베 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 처음 이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자를 납치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장영실의 측우기 1442년 세종대왕 때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하여 우량을 측정한 것은 세계 최초라는 서양의 로마 가스탤리 측우 기 보다 약 200년 앞서있다 *정평구 윤달구의 비차 조선후기 실학자 이구경이 편찬한 오주연문자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고전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정평구 윤달구라는 사람이 비차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을 비차에 태워 성 밖으로 대리고 나왔는데 비거리가 30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든 것 보다 300여년을 앞선 발명인데 어째서 더 이상 발전 되지 못하 고 사장되어 버렸는가. 농, 공, 상을 쌍놈으로 취급하는 상노제도 때문에 가문이 쌍놈으로 전락 하는 그런 신세 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폐일언하고 늦었지만 세계분재역사에 대하여 바로 잡아 보겠다고 별첨과 같은 글을 세계 분재 계에 알렸지만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미국을 비롯하여 분재 계에서는 객관적인 검증방법 즉 대한민 국 문화부 또는 사학계라던가 한국 분재 협회나, 조합, 학계 논문 같은 것을 알려 달라했다 허지만 대한민국 어 느 곳에서도 이를 증언 해줄 곳이나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도 안타까워 필자의 볼로그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silverln
http://blog.daum.net/silve 또는 분재역사 검색) 를 통해 글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문화의 창을 찾아다니다 보니 조선일보에서 “문화야 놀자”라는 문화 캠페인 창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문화자료를 되찾아 해당 기관 및 단체에 연계하고 우리 문화발전을 위해 공유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이글을 올린다. **소중한 우리 문화를 발굴하고자 하시는 조선일보 여러 분들에게 감사 들이고 세계최초의 분재문화 종주국으 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 세계 분재 계에서 의문시 하고 있는 부분은 첫째로 무용총 벽화의 축조 연대가 불명확하다는 것인데 필자가 조사 한 바로는 무용총 벽화는 4세기 말에서 5세게 초라 보는 이유는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AD)에 들어온 후 광개토대왕 장수왕은 불교를 숭상 하고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이러한 불교문화의 흔적이 고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덕흥리 고분(408AD)과 무용총 고분에 공히 불교적인 색채가 짖고 연꽃으로 장 식한 것이나 벽화가 동일 형태로 천정까지 이어 진 것으로 봐서 무용총 고분은 덕흥리 고분과 동시대에 축조 된 것이라 추정이 되고 불교가 들어온 소수림왕 2년(372AD) 이후 광개토대왕(392-413AS) 장수왕(413-492AD) 또는 늦어도 문자명왕(492-519AD) 시대의 무덤으로 보아진다. 현 강화군에 있는 백련사의 유래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백련사는 고려산(436m)의 (옛 명칭은 오련산)이다.
http://www.ganghwa.incheon.kr/pub/tur/turActTurView.jsp?index=257&sc=tur01030000_00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 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적, 백, 청, 황, 흑색의 다섯 색깔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백련사는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231번지 고려산 북쪽에 위치한 조계종 사찰인데 당시 백련이 떨어져서 백련사 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증거로는 덕흥리 고분벽화나 무용총 벽화의 바탕에 먼저 석회를 바른 후에 그림을 그린 방법도 동일한 것으로 봐서 동시대의 고분을 볼 때 무용총 벽화도 4세기 말에 축조 되었다고 불수 있지만 이부분에대해서는 고고학자 사학자들의 더 자세한 고증이 필요 하다고 본다. 둘째로 무용총 이 있는 현 중국의 길림성 안악시가 당시에도 한국영토였나 중국영이냐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무용총이 있는 길림성 안악 시는 압록강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현재는 중국 땅이지만 4~5세기에는 고구려 영토임이 분명하고 고구려 벽화가 있는 대부분의 고분들이 평안 남북도 와 압록강 주변에 밀집되어 있지만 현 중국의 고구려사를 외곡 하여 중국역사라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학자들의 반증이 필요하게 되어 있다 더욱이 무용총이 있는 길림성 안악시는 4세기 당시에는 고구려 땅이였지만 지금은 압록강 바로건너 중국 땅이고 고분 벽화는 지금까지 잘 보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대도 장희태자 무덤의 분재 그림은 세계 분재 계에 보고 하면서 37년이나 먼저 발견된 무용총 분재에 대해서는 말이 없는가. 그 이유는 당시 안악 시는 고대 한국 땅이 었기 때문이 아닌가. *******************************************************
세계의 유관 분재 계에 보고한 내용이다 -History of Bonsai-
In the history of bonsai, it is recorded that the origin of bonsai is found during Dynasty (618 - 907 AD). Murals of bonsai were reportedly found on the tomb of King Te-Jong’s son, Prince Lee Hyun Zhang Huai. However, the archeological evidence of murals of bonsai can be traced even further back. Hence, the dates are indeed in need of correction. From the time of the three Korean dynasties, there were gardens with artificial ponds that imitated natural beauty. Some examples include classic history books, volume 3 of Beck Je Bonghi, and volumes 26-27 of Samguk Saghi by Bu-Sik Kim. It is recorded in these books that during the 7th reigning year of King Jin-Sa of Baek-Jae Dynasy (391AD) that there were artificial ponds with plants and flowers in the royal palace. However, images of bonsai can be traced even further back to Koguryeo Dynasty (37BC - 668AD), where murals of bonsais were found in Dance Tomb (named so because of the dancing pictures that were found on the walls) that were built round 300AD -500AD. The murals that were founded in Dukhung-Ri’s tomb date back to December 12, 408 AD. These murals share the same Buddhistic water-lilies as the Dance Tomb. This connection shows that the Dance Tomb was from the same period. The murals of bonsai in the Dance Tomb of Koguryeo Dynasty date back to at least 200 years prior to the ones found during a correction in the following excerpt from World's History of Bonsai.
Zhang Huai of the Tang Dynasty (618 - 907 A.D.) who died in 706 A.D. Two murals in the tomb show servants carrying plants resembling bonsai. In one painting, a servant is carrying a miniature landscaped plant and in another painting, a servant is carrying a potted tree." Benny Byunghee Kim Honorary President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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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 역사- [세계분재 역사의 시작은 중국 당나라(618~907AD) 때 발견된 분재를 기원으로 한다. 분재 벽화는 당태종 임금의 아들 이현 장휘 태자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대 역사의 기술은 잘못이므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의 고대 삼국시대부터 연못을 파고 인공적인 자연미를 연출한 정원이 있었다. 역사적인 사료의 예를 든다면 고대 역사책인 백제 본기 3권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 26~27권에는 백제 진사왕 7년 (391AD) 때 궁궐에 연못을 파고 돌 사이에 나무와 꽃을 심었고 새를 키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다 먼저 고구려(BC37~AD668) 때 축조된 무용총(AD300~AD500) 벽화에 초물 분재와 분재 그림이 있다 이 무용총은 AD300~AD500 에 축조된 것이라는 것이 고증 되어 있다 많은 무덤 중의 하나인 덕흥리 무덤은 AD 408 년 12월 12일에 (77세에 죽은 진의 무덤) 만들어 진 것이다 덕흥리 무덤 그리고 무용총 무덤의 특징은 연꽃으로 장식한 불교적인 양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런 것은 같은 시기에 조성된 무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무용총에 벽화에 나오는 분재 그림은 중국 당나라 (618~907AD) 장의 태자(AD706) 무덤에 나오는 분재 그림보다 적어도 200년 이상 앞선다. 이런 이유로 아래의 세계분재 역사기록은 수정도어야 마땅하다 분재역사를 증명하는 최고의 기록은 당나라(618-907AD ) 706AD년에 죽은 장희 태자의 무덤이 1972년에 발굴 되면서 발견 되었다 무덤에는 신녀가 들고 있는 분재와 유사한 두 개의 벽화가 있는데 하나는 분경 이고 또 다를 하나는 화분에 나무를 심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사 합니다]
김병희 (Benny Kim) 미주한인 분재 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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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본인의 불로그 와 한국 분재 계에 보고한 내용이다(검색창: 분재 역사)
세계 분재역사를 다시 쓴다
한국 분재 문화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무용총 분재 벽화가 있는 한 이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 백제 진사왕 7년(391AD)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하고 있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백제본기 3권 삼국사기 25권) * 백재 동서왕 22년 (500AD)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는 기록이 (삼구사기 26권 백제본기 제4권)있다 *
뿐만 아니라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법륭사 조경도 백제인 노자공이 설계 시공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봐서도 당시 한국의 조경 술과 함께 분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가 1970년대에 사업을 하면서 분재 취미에 몰입해 있을 때 한국 최초로 분재 수석 지를 창간하고 한국 분재 문화 재건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 장준건씨 이였는데 이분으로부터 한국 분재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역사적인 사료가 있느냐 물었더니 고분벽화에 분재그림이 나타나고 삼국시대 민화에서 볼 수 있지만 년대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 했다 그러나 이분이 돌아가시고 한국의 분재역사에 대한 사로는 고려 중엽부터 분재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사료를 제시 하고 있었지만 삼국시대의 분재 역사 자료는 찾을 길이 없었다. 미국에서 세계역사를 기술한 것을 보면 대부분 중국 일본 미국으로 전해 왔다는 역사적인 배경은 있어도 한국분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장준건시의 말을 생각이 나서 삼국시대 고분 벽화를 검색하고 뒤지는 중에 고구려 무용총벽화에서 분재 벽화를 발견하고 이글을 올려 한국 분재 계에 알리고 세계분재 역사관에도 보고 하고자 한다. 한국의 분재 역사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로 인해 고려 중기에서 700여년을 앞당겨 기술 하게 되었다 동시에 세계 분재 역사도 중국에 앞서 종주국이 된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되는 것은 무용총은 고구려 초기 4~5세기 경의 무덤으로 고증되고 있음으로(고구려 당시 의 고분군으로 연대가 확실한 무덤은 덕흥리 벽화 무덤으로 무덤의 주인공인 “진”이란 사람은 광개토대왕 영락 18년(AD408년) 12 월 12일 77세로 사망 했다는 명문이 있다) 중국 당나라 장회태자 (AD706년 사망)능 벽화 보다 최소 200년을 앞서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한국분재 역사를 약술하면 *고려중기 재상 이 규보李圭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집)」에 게재된 가분중육영 (家盆中六詠)과 고려후기의 명현인 전 록생(1318-1375)의 영분송 (詠盆松), 정몽주의 「포은집 圃隱集」 에 기록된 분종송죽난매시 (盆種松竹蘭梅詩)」, 이 색(1328-1396)의「목은집」에 수록된 영분송詠盆松이 있음을 볼 때에 이 시기에는 분재를 많이 가꾸고 즐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말기(서기1300년대)에는 사계분도(四季盆圖)에도 분재가 등장하고 *130여년이 지나 고려 말기 재상을 지낸 전녹생(田祿生:1318~75)이 8세 때 지은 《영분송(詠盆松)》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인재 강희안(1419 -1464)의 『양화소록(良貨)』이라 분재 고전이 있고 *고려 말에서 이조 초기 까지 한국의 분재 문화가 꽃을 피우다 조선조 중엽부터 갑자가 살아지는 것은 농,공,상을 천시하는 상노제도가 그렇게 만들었고 이때 도자기 금속공예등과 함께 분재 문화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위에서
무용총분재 벽화로 분재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겠다. 무용총은 4~5세게 경의 고구려 무덤으로 고증되고 있다 이 고분 벽화는 당나라(Tang Dynasty (618 - 907 A.D.)태종의 아들 장회 태자 이현(Prince Zhang Huai) 의 무덤(AD706) 벽화에서 나오는 초물 분재 보다 약 200년이 앞선 역사적인 사료가 된다.
물론 이 벽화만으로 한국분재 가 중국에 앞선다고 단정하기에는 좀 더 학술적인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실물 물증만으로 본다면 중국에 앞선다는 역사적인 사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에서는 후한시대 (AD25-AD220)의 고분 벽화에서도 분재 그림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물증거가 없어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 세계의 분재 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분제역사의 기원은 1972년에 발굴된 당태종의 태자 장회 태자 (AD706사망)의 무덤 벽화에 나오는 초물분재가 분재 역사의 기원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국 무용총의 분제 벽화는 분명히 장회태자 묘에서 나온 분재 보다 압서 있기 때문에 아래의 세계 분재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The earliest documented proof of bonsai was discovered in 1972 in the tomb of Prince Zhang Huai, of the Tang Dynasty (618 - 907 A.D.) who died in 706 A.D. Two wall paintings discovered in the tomb show servants carrying plants resembling bonsai. In one of the paintings a servant is seen carrying a miniature landscape and in the other painting a servant is shown carrying a pot containing a tree.
(현재 세계 분제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이 증거는 당나라 장회 태자 묘의 벽화라 기술하고 있다)
참조 원문출처 *무용총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1/200401190004.html
http://www.goguryeo.org/murals/o_jian_chummudeom.php
http://mybox.happycampus.com/pega33/1742494
*덕흥리 고분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2&id=248 http://kids.hankooki.com/lpage/study/200503/kd2005033115164845730.htm http://www.sinnaschool.com/zboard/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6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24609&v=45
*안악 3호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q=&p=&masterno=842333&contentno=842333 http://www.palhae.org/zb4/view.php?id=pds&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8
*삼국사기 (백재본기) http://kr.blog.yahoo.com/kjchuel/1863.html?p=1&pm=l&tc=15&tt=1227224160
*4세기 때의 고구려 http://happyday2.tistory.com/entry/%EA%B3%A0%EA%B5%AC%EB%A0%A4-%EC%A7%80%EB%8F%841
*그 외 고구려와 벽화 에 관한 영문 사이드 http://en.wikipedia.org/wiki/Goguryeo http://en.wikipedia.org/wiki/Anak_Tomb_No.3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Complex_of_Goguryeo_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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