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세계 분재역사를 다시 쓴다

benny kim 2008. 8. 27. 10:15

세계 분재역사를 다시 쓴다

 

 

              당나라 장회 태자묘의 벽화에 나온는 초물 분재 그림(AD706)

 

한국 분재 문화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무용총 분재 벽화가 있는 한 이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 정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

백제 진사왕 7년(391AD)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하고 있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백제본기 3권 삼국사기 2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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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 동서왕 22년 (500AD)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는 기록이 (삼구사기 26권 백제본기 제4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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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법륭사 조경도 백제인 노자공이 설계 시공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봐서도 당시 한국의 조경 술과 함께 분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가

 

1970년대에 사업을 하면서 분재 취미에 몰입해 있을 때 한국 최초로 분재 수석 지를 창간하고 한국 분재 문화재건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 장준건씨 이였는데 이분으로부터 한국 분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역사적인 사료가 있느냐 물었더니 고분벽화에 분재그림이 나타나고 삼국시대 민화에서 볼 수 있지만 년대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 했다 그러나 이분이 돌아가시고 한국의 분재역사에 대한 사로는 고려 중엽부터 분재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사료를 제시 하고 있었지만 삼국시대의 분재 역사 자료는 찾을 길이 없었다. 미국에서 세계역사를 기술한 것을 보면 대부분 중국 일본 미국으로 전해 왔다는 역사적인 배경은 있어도 한국분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장준건시의 말을 생각이 나서 삼국시대 고분 벽화를 검색하고 뒤지는 중에 고구려 무용총벽화에서 분재 벽화를 발견하고 이글을 올려 한국 분재 계에 알리고 세계분재 역사관에도 보고 하고자 한다.

한국의 분재 역사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로 인해 고려 중기에서 700여년을 앞당겨 기술 하게 되었다

동시에 세계 분재 역사도 중국에 앞서 종주국이 된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되는 것은 무용총은 고구려 초기 4~5세기 경의 무덤으로 고증되고 있음으로(고구려 당시 의 고분군으로 연대가 확실한 무덤은 덕흥리 벽화 무덤으로 무덤의 주인공인 “진”이란 사람은 광개토대왕 영락 18년(AD408년) 12 월 12일 77세로 사망 했다는 명문이 있다)

중국 당나라 장회태자 (AD706년 사망)능 벽화 보다 최소 200년을 앞서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한국분재 역사를 약술하면

*고려중기 재상 이 규보李圭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집)」에 게재된 가분중육영(家盆中六詠)과 고려후기의 명현인 전 록생(1318-1375)의 영분송 (詠盆松), 정몽주의 「포은집 圃隱集」에 기록된 분종송죽난매시 (盆種松竹蘭梅詩)」, 이 색(1328-1396)의「목은집」에 수록된 영분송詠盆松이 있음을 볼 때에 이 시기에는 분재를 많이 가꾸고 즐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말기(서기1300년대)에는 사계분도(四季盆圖)에도 분재가 등장하고

*130여년이 지나 고려 말기 재상을 지낸 전녹생(田祿生:1318~75)이 8세 때 지은《영분송(詠盆松)》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인재 강희안(1419 -1464)의 『양화소록(良貨)』이라 분재 고전이 있고

*고려 말에서 이조 초기 까지 한국의 분재 문화가 꽃을 피우다 조선조 중엽부터 갑자가 살아지는 것은 농,공,상을 천시하는 상노제도가 그렇게 만들었고 이때 도자기 금속공예등과 함께 분재 문화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위에서

무용총분재 벽화로 분재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겠다.

무용총은 4~5세게 경의 고구려 무덤으로 고증되고 있다

이 고분 벽화는 당나라(Tang Dynasty (618 - 907 A.D.)태종의 아들 장회 태자 이현(Prince Zhang Huai) 의 무덤(AD706) 벽화에서 나오는 초물 분재 보다 약 200년이 앞선 역사적인 사료가 된다.

물론 이 벽화만으로 한국분재 가 중국에 앞선다고 단정하기에는 좀 더 학술적인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실물 물증만으로 본다면 중국에 앞선다는 역사적인 사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에서는 후한시대 (AD25-AD220)의 고분 벽화에서도 분재 그림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물증거가 없어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 세계의 분재 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분제역사의 기원은 1972년에 발굴된 당태종의 태자 장회 태자(AD706사망)의 무덤 벽화에 나오는 초물분재가 분재 역사의 기원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국 무용총의 분제 벽화는 분명히 장회태자 묘에서 나온 분재 보다 압서 있기 때문에 아래의 세계 분재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The earliest documented proof of bonsai was discovered in 1972 in the tomb of Prince Zhang Huai, of the Tang Dynasty (618 - 907 A.D.) who died in 706 A.D. Two wall paintings discovered in the tomb show servants carrying plants resembling bonsai. In one of the paintings a servant is seen carrying a miniature landscape and in the other painting a servant is shown carrying a pot containing a tree.(현재 세계 분제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이 증거는 당나라 장회 태자 묘의 벽화라 기술하고 있다)

 

 

 

 

무용촌 벽화 왼편 끝에 이는 그립은 분명한 분재 이다

 

 

 

 

원본 사진에 보필했음

 

 

 

초물 분재로 보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