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따라 가버린 간질병 누나-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도 여윳돈 모아서 일가친척 도우는 일
또한 어머님이 하셨다
당시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셨는데 이웃동리에 사시는 이모님
한분이 계셨는데 어머님 성품과 너무도 많이 닮으셨다
우리 형제들도 이모님의 정에 끌려 자주 들리곤 했는데 갈 때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였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쌀겨로 만든 개떡
박에 없으니 한사고 먹으라. 권하곤 하셨다 이런 이모님을 어머님은
쌀이며 김치며 밑반찬 만들어 나누어 주시곤 하셨다
어머님의 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한도 없지만 4촌 누님에 대한
추억만은 빼어놓을 수가 없다.
이 누님은 큰 아버님의 딸로 결혼했지만, 간질 병을 얻어 시가집에서 쫓겨나
단칸방 친정에 돌아갈 형편이 못되다 보니 갓난아기 등에 업고 우리 집으로
왔는데 당시 우리 집 역시 13명의 대 식구라 오래 함께 있을 형편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겨울만 나고 아버님은 시가로 돌아가라며 돌려보냈지만, 어머님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담은 쌀 자루와 모아 놓은 돈을 쥐어 주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보내기는 하였지만, 친 딸을 보내는 마음으로 가슴 아파하셨다.
이런 누님은 일 년에 한두 번 오시곤 하였지만, 매를 맞았는지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아기도 제대로 먹지 못해 많이 허약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이 일어나면 아무 데 서고 쓰러져 거품을 물고
버둥거리는데 어머님은 이런 누님을 부둥켜 안고 마사지 해주며 보살펴 주셨다
나도 어린 마음이었지만 누님이 너무 불쌍해서 몇 개월 오시지 않으면
몹시 기다려지기도 했고 어머님 또한 걱정을 하시곤 하셨는데 어느
해부터는 영영 소식도 끊여지고 말았으니 아마도 고생도 병도 없는 하늘
나라로 가셨나 보다 하시며 세상에서 몸 둘 곳 없이 고생하며 수없이 가고
싶은 곳이었겠지만 어린 새끼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을 터인데 아마
그 애기가 먼저 죽었을 것이고 새끼 따라갔는가 싶다 하시기도 하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던 어머님이셨다.
어머님의 종교관
어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부처님을 섬기는 불교신자 이었다
그러다 자식들 하나둘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아들 딸 며느리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시기는 하였지만 어머님의 종교관은 좀 특이 하였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간단한 예로 기도를 하고 마지막 에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아멘 나무 관세음보살 하시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아멘 한다. 허지만 아멘하고
난후에도 어머님의 입술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은 소리 나지
않게 후렴으로 나무 관세음보살 하시는 장면인데 우리 가족들만 안다
그래서 물었다
어머님 교회에 나가면서 아멘만 하지지 않고 왜 나무 관세음보살을 붙이십니까.
하면 야야 내가 수십 년을 섬겨온 부처님을 하루아침에 벌릴 수야 없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도 옳은 말씀이고 부처님 말씀도 다 좋은 말씀인데 꼭
한분만 섬기라는 법이 어디 있나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러시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나는 우상이고 뭐고 그런 것 모른다.
우리가 살면서 한참 좋아 하던 사람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고 변심을 하게 되면 가슴이 아픈 법인데 하물며 부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런 짓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그래서인지 어머님은 부처님이 덜 서운하시게 때로는 나무 관세음보살
먼저하고 후렴으로 아멘 하시기도 했다
그러시고는 너희들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는 한다마는 우상이네 뭐네
하면서 조상에게 제사도 못 지내게 하고 교회끼리 네가 옳네. 내가 옳네.
다투는 것도 참 못마땅하다
어머님 그건 어머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런 다툼은 사람들의 잘못생각이지
원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웃고 말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님의 종교관이 옳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던 각자의 종교를 존중해주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종교인이고 내가 믿는 종교만이 옳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어머님은 이미 이승을 떠나 낙원에 가계시겠지만 한때 믿고
가시고자 하신 극락세계에도 가계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세계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원이나 결국
알고 보니 같은 곳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아버님과의 사별
일제의 압제와 해방 한국 전쟁을 겪으며 온갖 풍상의 암울한 터널을 겨우
지나고 이제야 한 시름 놓고 편히 살게 되려 하실 때 아버님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3년간 온몸 바쳐 병 시중의 보람도 없이 회 갑도
채우지 못하시고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 만 것이다.
당시 어머님의 연세 52세이었으니 요즘으로 보면 아직 한참 젊은 시절에
혼자가 되시고 시련은 다시 시작되신 것이다
우리 6남매가 있었지만, 큰 형님 이외 5남매 모두 아직 미혼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니 자식 힘들게 키워 공부 시킨 보람도 없이 마음고생만 시키신 것 같았다
자나 깨나 장가 시집 보낼 걱정만 하셨다.
그런 어머님의 심정도 모르고 좋은 혼 처가 들어와 반기며 우리 혼사 문제를
들고 나올 때는 한마디로 거절하며 우리 결혼 문제는 우리가 다 알아 할
터인데 왜 어머님이 자꾸 나서느냐며 투정을 부리곤 했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불효 막심했던 것 같다
인물이 빠지나! 공부는 할 만큼 다하고 직장도 사업도 하면서 일등 신랑
신붓감인데 30~40이 되도록 장가 시집갈 생각도 않고 있었으니 어머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대기만성이라 더니 나이 들고 자식 키워 보니 이제야 철이 들어 불효막심했던
심정에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지만, 어머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신데
후회하면 뭘 하나 가슴이 터질 뿐이다
둘째 형님은 서울사대를 나오시고 서울 고등학교 교사로 계셨고 나는
자수성가해서 중소기업 을 창업해서 안정되어 있었지만 아버님
돌아가시고 큰형님은 3남1일녀 자식들이 있었지만 엄한 아버님
밑에서 가장노릇 한번 해보지 못가고 사시다가 감자기 재산을 관리
하려다 보니 만사가 서툴고 실수가 많아 아버님이 남기신 농토며
도정공자까지 다 날려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머님과 형님 형수님과의 사이도 소원해 지면서
가슴앓이를 많이도 하셨다
평생고생고생 하며 모아온 재산을 모두 팔아 치울 때마다 말리다 가슴에
응어리만 생겨 고만 화병이 생겨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다
이런 어머님 보시면서 큰형님 내외도 이제 스스로 자림하게 놓아두시고
우리가 모시겠다며 둘째 형님 과 함께 권유했지만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여동생(송화)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다 시며
대학재학중인 남동생과 함께 학비나 부담 하라 하셨다
당시 나는 그래도 하던 사업이 제법 안정을 찾으면서 40대 노총각으로
있어 출가전의 여동생과 대학 재학 중인 막내남동생만 서울 우리집로 와서
여동생은 살림을 꾸려 주고 있었는데 막내 여동생이 졸업하고 함께
살던 동생은 출가를 하면서 어머님은 막내 함께 서울 집으로 오시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한 삶을 사셨던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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