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죽먹는 피난민들-
휴전을 앞두고 막바지 전선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머님의 정화 수
기도는 더욱 길어지기만 했다.
이런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도 감동하였던 지 죽음을 면하고
살아 돌아오신 것이다.
후퇴 명령을 받고 포위망을 뚫고 나오다 동료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를 하였지만,
형님은 부상만 당하였고 무릎에 박힌 총탄 제거를 위해 후송되었고
입원실이 턱없이 부족한 당시에는 가벼운 부상자는 명예 제대를 시키는
바람에 휴전 조인 몇 개월 남겨 놓고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나는 어머님의
사랑과 지극 정성이 형님을 살리신 것이라 믿고 있다
사실 어머님의 자식사랑에 대한 처절한 모성애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고,
어린이를 납치해서 죄를 짓고 돈을 요구하는 유괴범음 보면
분기탱천 하게 한다.
내 바로 아래 여동생 송자 이야기이다
아마 동생이 4~5세 정도 되었을 때 인 것 같다
김해읍 장날에 아버지 따라 나섰다가 고만 길을 읽어 버리고 미아가 된 후
몇 개월 동안 소식이 없어 진 것이다
당시에야 요즘처럼 유괴범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혹시 무자식이 훔쳐
간 것은 아닌지 아니면 무선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별이 별 생각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버님과 어머님과의 자식사랑에 대한 구별은 선명하게
나 있었으니 아버님은 그저 돌아 올 것이라 낙천적인 반면 어머님은
밤잠을 설치면서 아버님의 이런 태도에 못 마땅해서 다투는 모습도 보았다
그러다 어머님은 무작정 김해읍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을 걸어 다니며 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다니다 지치면 일가친척집에 머물면서 몇 개월을 찾았지만 헛고생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다시 밤이고 낮이고 송자야 어디 있노 울기도하고
신령님께 딸 무사하기를 수도 없이 비는 모습도 보면서 엄마의 자식
사랑이란 게 이런 게로 구나 어른이 다되어서도 모성애에 대한 말만
나오면 전장에 나가있는 큰형님과 잃어 버렸던 송자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곤 했다
결국 어머님이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아기를
찾는다고 퍼트린 소문이 돌고 돌아 결국 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분이 연락을 해왔다
어머님은 반가운 마음에 단걸음에 그 집을 찾아 갔었는데 앞마당에 또래
친구들과 손곱놀이를 하고 있는 딸을 부둥켜 않고 얼마를 울었는지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이제 고만하시고 안으로 드시시오 하시며 일으켜
세워 주시는 주인 마님손길을 느끼고 제정신을 찾으셨다 하셨다
시장 통을 훨씬 벗어난 길에서 울고 있는 이기를 대리고 와서 그동안 잘
보살펴 주신 주인마님에게 백배 사례를 하고 데리고 온 것이다
이러한 어머님의 사랑과 정성이 전쟁터의 형님도 살아 돌아오게 한 것이다
휴전이 되자 각 학교 운동장에 피난민 가건물에 살던 분들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렬이 이어 젖은데 이때 우리 집에도 매일 수십 명씩
작별인사를 하는 피난민들을 보면서 어머님의 이웃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도정공장을 하다 보니 보리를 도정하고 나면 남은
겨가 나오는데 이걸 가지고 쇠죽을 끓여 소를 키웠다.
허나 피난민들은 이것을 얻어다 보리 겨죽을 끊여 연명하고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님을 매일 나오는 이 겨를 모아 쇠죽 대신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인데 아침 새벽부터 이 겨를 배급받기 위해 우리 집
앞에는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겨를 얻었지만 이걸 끓일 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머님은
쓰지 않은 냄비며 솥을 나누어 주시다가 마지막에는 쇠붙이로 된
세숫대야 심지어 다 찌그러진 개 밥통 약탕기 뚝배기 등등 불에 타지 않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나누어 주신 것인데 피난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런 고물들을 돌려주면서 수십 번식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모습에서
어머님의 이웃사랑 위대한 성품을 보아 온 것이다
3년간 이어온 한국전쟁은 미완으로 끝이 났지만 다시 가난과 싸워야
하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가정 살림이 어려워지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눈으로 보아 왔다
어머님으로 본다면 중조부모 돌아가시고 시누 시동생 시집 장가 분가를
하기는 하였다 해도 다시 며느리보고 손자 손녀 가 태어났으니 식구는
여전히 13명이나 되어 한시도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 지긋지긋한 부엌일만 며느리에게 맡겨 놓은 것이 큰 짐 하나
볏겨 놓은 기분 이였을 것이다
그래도 시골에서 도정공장을 운영하시는 아버님 덕분으로 우리들은
중고 대학까지 마칠 있었지마는 시골 부자라 해봐야 대가족 3시 세끼
굶지 않을 정도이지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 대학까지 자식 손자 학비며
자잘 구례한 현찰을 만들기 위해서는 끝도 한도 없이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농사일 요즘처럼 농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농약비료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돌아서면 무섭게 자라는 잡초를 재거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밭농사는 주로 어머님이 도맡아 하셨는데 콩을 심어 매주 만들어 간장
된장 만들어야 하고 고추심어 따서 말리고 갈아서 고추장 만들어야
하고 마늘심어 양념 만들어야 하고 고구마 감자 심어 추수하고 나면
무 배추심어 가을 김장감 정성 드려 키워서 겨울이 오기 전에 큰독에
김장해서 음지에 묻어 놓고 대식구 겨울 반찬 준비도 해야 한다
옛날처럼 길쌈하고 누에쳐서 물래 돌리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아버님이 사다주신 재봉틀 앞에 앉아 밤을 새워 가며 애기 옷 어른
양복을 만들어 돈을 벌어 봤자 매월 한두 번 식 다가오는 선대조상
제사상 장만하는데도 모자라는 판이었다.
선대 조상이 많다보니 매월 한두 번 다가오는 제삿날에는 며칠 전부터
십리나 떨어진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정성을 다해 차례 상을 준비를
하다보면 이 또한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도 5형제 동서들 좀 일찍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 이였지만 모두 제삿날 저녁에 몰려와 절만하고
차례음식 봉지 봉지 싸가지고 아침에 떠나버리는 동서네 식구가 못내
야속하기라도 했을 터인데 그런 불평도 할 줄 모르시는 분이라며
형수님(큰며느리)은 항상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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