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가족 이야기

어머님의 일생 -3- 정화수 기도

benny kim 2010. 4. 11. 03:01

-전선에서 날아온 우편엽서-

16살 시집와서 지옥 같은 시집살이 하시면서 수도 없이 부르고 또 부를 때
힘이 되어주셨을 그때 그 친정어머님을 부르시고 있었던 것이다.
6남매 힘들게 키우면서 주신 사랑은 오직 자식 사랑이었고 자신이 위기에
부닥쳐 받고 싶은 사랑은 자식 사랑이 아니라 어머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깊고 깊은 어머님의 본능적인 사랑이 무엇 인가를 60이 다된
나이 에야 비로소 깨달았고 눈물로 솥아 부어 놓은 눈 녹인 물을 드리고
싶어 젓던 것이다

어머님은 구급차에 실려 응급 수술을 받으시고 몇 개월 간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이곳에 사는 우리 형제들이 순서를 정하여 24시간 병상을 지키다
보니 담당 간병인은 할 일이 없어졌다.

개인주의가 생활의 습관이 되어 있는 미국인들은 아무리 부모라 해도 병원
간호사에게 맡겨 놓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병문안을 하면 그것은 효자 축에 든다.
그렇지 않으면 사망 통지서나 퇴원 절차상 필요에 의해 병원 측의 요청이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몇 개월을 한시도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 한인 가족들을 보고 파란
눈의 미국 사람들에게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의사 간호사 할 것 없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할머니라고 소문이 났다.

미국 분들은 한국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부모를 모시는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특별한 효도라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키워주신
부모에게 대한 당연한 도리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누구나 다 이렇게
한다고 하였더니 참 좋은 문화를 가졌다고 부러워했다.

가족들의 정성과 병원의 현대 의술 덕분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았을 때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 애들 아! 내가 개한테 물린 것은 천만 다행이라 생각해라

그 개는 언젠 가는 큰일을 저지를 놈이었어.
내가 물리지 않았다면 우리 하나, 나리, 종화가 당했을 것이다.
나야 살 만큼 산 사람이지만 청춘이 만 리 같은 아이들이 변을 당했으면
어쩔 뻔했겠나.
하시는 말씀에 우리 모두 숙면해지면서 가없이 크고 넓은 자식, 손자
사랑이 뼛속으로 파고들어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어머님의 분가
아버님은 맏아들은 아니었지만 큰아버님 대신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시고 계셨다
큰아버님은 성품은 온화 하시고 참 좋은 분이셨다
집안 장손이라 할아버지께서는 벼슬길로 보내기 위해 농사일을
못하게 하고 서당 선생님 모셔 놓고 한학공부만 하게 하셨는데
식자우환이라 벼슬도 못하고 그렇다고 농사일도 못하다 보니
스트레스만 쌓인 것인데 이를 피하려다 그만 술과 놀음에 빠져
부모는 물론 친 가족들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결혼하고 분가 후에는
큰어머님이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겨우겨우
먹고살았지만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그런 큰어머님을 부모 모르게 도와주다 보니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시골 농사로는 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용단을 내려 빚을 얻어 김해 읍에다 점포를 구입하고
건어물 장사를 시작 하셨는데 몇 년 안가 성실과 신용 있는 도매상으로
탈바꿈하면서 대상이 되었다.
호사다마라 더니 성공 가도를 달리던 아버님도 3번이나 큰 사기를
당하시고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님은 주로 건어물 중에 명태를 전문으로 하셨는데 당시 함경
남북 도에 가셔서 잘 말려진 명태를 한번에 2-3만 엔
(당시엔 단위면 아마 지금 몇 억대는 될 것이다)
어치를 구입하고 기차로 운송해 경남 일대의 소매상에 공급하는 도매상 이였다.
그런데 그동안 성실하게 거래를 해온 수집상만 믿고 운송을 부탁하고
내려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물건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전화도 없는 당시에는 기차를 타고 현지로 달려가 확인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다시 현지에 가보니 수집상은 돈만 챙기고 도망을 가버렸으니
찾을 길이 없었다.

장사밑천 전부를 투자 한 것인데 수년간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날려
버렸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고 막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 소식을 들은 소매상들은 아버님의
성실성을 믿고 선금으로 돈을 먼저 줄 테니 다시 물건을 해 오라 부탁을
해오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선금을 받아 다시 일어나고 했는데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사기를 3번이나 당하셨다 한다.

이렇게 어머님은 김해 읍에 사시면서도 잠시 잠시 들려 시골
부모님 보살펴야 했고 농사일도 챙겨 가며 다시 아버님 곁에서 장사일
도해야 했으니 눈뜰 새 가 없었지만 그래도 돈도 벌고 시부모 곁을 떠나
잠시나마 분가해서 독립 살림을 할 때가 제일 편안했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시부모 눈치 보지 않고 발 뻗고 누워 볼 수 있는 것만도
새 세상 만난 기분 이였으리라.

이렇게 농사일을 하면서 장사를 하는데 아버님은 상술에 밝았는지
사업도 성공한 편이였고 신용이 쌓이다 보니 단골손님도 많았다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일본사람들이 많이 와서 상업에 종사 했는데 광복 이후
일본사람들이 철수를 하면서 집과 사업을 물려주려 한 일본인들이 많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도정공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셨다

해방이 되고 얼마 안 가 다시 6.25전쟁 이 일어나고 큰형님은 입대하여
전선에서 적과 싸워야 했다
이때 어머님의 자식 사랑에 대한 정성과 불철주야 형님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정의 위대함은 직접 느끼고 보아 왔다

아침마다 장독대에 정화 수 뜨다 놓고 형님 무사하기를 빌고 비는
어머님의 기도는 눈물겹도록 간절했다
그리고는 매일 집배원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모습,
"어머님 아버님 불 초 소자 무고하오니 심려 마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발신 주소도 없이 전선에서 날아오는 우편엽서를 받는
날이면 뛸 뜻이 기뻐하다 가도 이웃 사람들에게 전사 통지서라도 오는
날이면 또다시 밤잠을 설치곤 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