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인가 눈~물인가 눈(雪)물이야기-
브랜다 민희 김 과 외삼촌
시집살이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 해도 한번 출가하면 외인이라는 철칙에
불평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참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2~3년 터 울로 30세 도 되기 전에 둘째 형님이 태어났고
내가 태어나고 내 아래로 쌍둥이 남자 이렇게 어머님은 줄줄이 남자만
6형제를 생산하였으니 참으로 김해 김 씨의 모범 며느리 역할을 다한 것이다.
6형제 중에 둘째 그리고 쌍둥이 동생은 태어나자 죽었지만,
그 후로 여동생 남동생이 태어났고 큰 형님 장가가서 손자 본 후 43세에
또다시 막내 여동생이 임신하고 나서는 며느리 보기 창피하다고
인공 유산 시키려 일부러 언덕에서 굴러 보기도 했지만 결국 막내
여동생은 죽지 않고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 막내 끈이나 이어 놓고 죽을는지 항상
그게 걱정이라 하셨지만 93세 돌아가실 무렵에는 막내 외 손자 손녀
둘씩이나 보았고 미국에서 가장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는 막내 손녀를
할머니가 키워주었고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동시 통역을 할 정도로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게 한 한국말 선생님이었던 것인데 이놈은
수시로 옛날 할머니가 계시던 방에 들어가서 옷장을 열어 놓고 한참
머리를 들이 밀고 있기도 했다는 데 엄마가
"민희야 너 왜 그러고 있니?"
물으면
"엄마 이곳에 할머님 냄새가 있어," 하고 눈에 이슬이
맺히곤 한다고 했다
요즘 세상 할머니가 그리워 할머니 냄새가 그리워 눈물 흘리는 효자
효녀 어디 있겠는가.
사실 어머님은 손녀 민희 뿐만 아니고 누구에게 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셨다
이건 정씨 가문의 내력인 것 같기도 했다 외 할머님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두 분의 외삼촌 3분의 이모 님까지 정말 정이 철 철 넘치는
분들이 섰고 그래서 그런지 외가 쪽 가족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다.
어릴 때 어머님 손잡고 외가 가던 일 막내 이모 님 따라다니던 일
손아래 이모 님 도토리 죽 개떡 만들어 가져다주시던 일 등등은
물론이고 우리 형제 모두 어머님과 외가 쪽의 정과 사랑의 웅덩이
속에서 자라났다고 하겠다.
우리 뿐만 아니고 이웃 친척에게도 베풀면서 살아오신 것인데 특히
큰 어머님과 그 가족을 돌보시기도 했다 큰 아버님이 도박으로 모든
재산 탕진하고 주 벽에 걸려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지만, 큰 어머님이
생선 등등을 이고 다니며 행상으로 근근히 가족을 부양하고 있을 때도
큰 어머님을 많이 도 도우셨다.
그래도 형편이 좀 낳은 어머님은 알게 모르게 자루에 쌀을 담아 큰
어머님 오실 때마다 주시곤 했고 조카들 학비도 보태주시곤 했다
나는 이런 어머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참 많이 도 힘드시게 한 것 같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잊을 수 없는 어머님의 정성 담긴
눈(雪)물 이야기가 있다.
아마 4~5세쯤 된 것 같다. 어머님이 고운 옷 입고 멀리 볼일을 보기
위해 떠나시던 날이었다.
철없는 나는 엄마를 한사코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
업고 가기에는 너무 크고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였으니 달래어서
떼어 놓고 가려는 데 한사코 말을 듣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우는
나를 떼어 놓고 빠른 걸음으로 신작로로 가신 것이다 산 모퉁이
돌아 어머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한여름 불볕에 주저앉아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이 일로 나는 고만 더위를 먹은 것이다.
름만 되면 열이 나고 먹지도 않고 삶은 시래기처럼 축 늘어져
차가운 다듬잇 돌에 뺨을 대고 누워 있기만 했던 것이다.
나를 유달리 사랑하셨던 어머님을 온갖 용하다는 한의원을 불러오기도
하고 한약을 정성 들여 달여 먹어도 차도가 없었던 참에 어느
돌팔이 의원의 처방은 장독을 햇빛 들지 않는 땅에 묻어 놓고
겨울 눈이 오거든 눈을 퍼 담아 놓고 여름 내내 그 눈물을 먹이면
낫는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안타까운 심정에 겨울 김칫독과 함께 수년 동안 이 눈독이
함께 있었고 나는 눈물인지 어머님의 눈물 인지를 마시며 여름을
보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몇 년 간 더위의 후유증은 계속 되었지만, 더위 병이 나았다면 눈물을
먹고 낳은 것이 아니라 어머님의 안타까워 흘린 눈물을 먹고 나았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어머님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눈물을
먹으며 자란 나는 누구보다 어머님의 사랑을 안다.
비록 더위 병을 낳게 하지는 못했을망정 자식을 지성으로 사랑하는
어머님의 마음은 눈물이 되어 나의 가슴 깊이 묻히게 해주신 것이다.
눈(雪)물! 50여 년이 흘러가고 먼 미국 땅 황량한 사막의 한 모퉁이에서
갑자기 어릴 적 눈물이 생각이 났고. 눈 녹인 눈물을 어머님께
드리 고 싶은 때 가 있었다.
그때는 사막의 불볕더위가 작렬하는 여름이라 눈물은 드리지 못했지만,
눈이 오는 겨울 이였었다면 내가 눈물을 드렸을 것이다.
어느 여름 내가 이곳에서 정원 손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님의
비명이 들려 왔다.
급히 달려오니 얼마 전 동생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를 이곳에 가져 왔는데
이 진돗개란 놈이 어머님의 허벅지를 물고 흔들고 있지 않은가?
빗자루로 때려 겨우 개를 쫓고 보니 물린 곳은 뼈가 드러나 있었고
반대편 허벅지는 골절 되어 있었다.
얼마나 아팠든지 80이 넘은 어머님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
세상에 살아 계시지도 않는 외할머님을 부르시며
"엄마야! 엄마야! 날 좀 살려 줘 엄마야!"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때 갑자기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머님의 눈 녹인 물이
생각이 났고 어머님의 신음 하는 소리는 엄마야! 눈물 좀 갖다
다오 엄마야! 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
그곳은 영원한 안식 처고 세상에서 아무리 고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위안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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