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가족 이야기

어머님의 일생 -1-

benny kim 2010. 4. 9. 13:41

-망팔 (望八) 노인의 한 맺힌 사모곡(思母曲)-

025.JPG

 

요즘 따라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간절해진다.

경상남도 주촌면 양동리 산골마을 외가 앞으로는 맑은 개천이 흘러내리고

길게 땋은 댕기 머리에 검은 치마 흰 저고리에 티 없이 맑고 아름답게

보였던 막내 이모 따라 들로 산으로 따라다니며 봄나물 캐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사립 문 초가에는 삽살개가 꼬리를 치며 반겼고 담장에 기대고 선

겨울 감나무,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빨간 감만 주렁주렁

보석처럼 달렸었던 모습은 아직 도 눈앞에 선하다,

 

우리 어머님은 이런 집에서 1911년 (辛亥) 3월 15일 외할아버지 정학모

외할머님 조기순의 2남 4녀 중 위로 외삼촌 다음으로 첫째 딸로

태어나셨다가 2004년 5월 하나님 곁으로 가신 93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온 일생의 역사를 다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겠지만,

여자라는 죄로 태어나면서 온갖 풍랑 다 겪으며 일제 36년,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 한국의 여성이 살아온 삶의 애환과 더불어 나와

우리 가족에 남긴 사랑의 흔적을 가족역사 책에 남겨 놓고자 한다

.

어머님은 요즘 중학생 나이에 불과한 16살에 주촌면 천곡리

5남 4녀 중 둘째 아들 김해 김 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증조 부 내외 조 부모 내외 시부모 내외 그리고 5남 4녀 중 분가한

큰아버지 가족만 제외하고 3대로 16식구가 한 집안에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위로 한학공부를 많이 한 큰 아버님 한 분이 계셨지만,

벼슬은커녕 노름에 빠져 재산 다 탕진하고 가족도 돌보지 않아 버린

자식이었으니 아버님이 종갓집 장손행사를 했다.) 시집을 왔으니

요즘 여성이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집안이었던 것이다

 

동이 트기도 전에 물동이이고 1km 떨어져 있는 우물에 온 식구가

하로 쓸 물을 길어 날라야 했고 날이 밝아지면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증조부모 조 부모 시부모 찾아가 아침 문안 인사드리고 나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큰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16식구 아침 상 준비를

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달픈 시집살이였겠는가.

 

아침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들로 나가고 여자들은 밭에 나가 김을

매던가. 뽕밭에 나가 뽕 따는 일 어머님은 설거지하고 들에 나가 있는

남정네 중식 준비해서 이고 지고 날아야 했으니 이건 보통 중 노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준비한 음식 머리에 이고 곡예처럼 좁은 논두렁 길

가다 미끄러지고 음식 논바닥에 다 쏟아,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이런

곳에 시집보낸 친정 부모 원망도 많이 했다 하셨다

 

이런 와중에 임신까지 하였으니 배속 아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나.

17살 어린 나이에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한 산모가 낳은 아기는

태어나서 울지도 못했다 하셨다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한 산모라서

그런지 젖이 나오지 않았단 다. 요즘처럼 분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멀겋게 끎인 미음만 먹이며 키우다 보니 허약하고 발육도 좋지

못하였고 감기에 병치레를 달고 다녔다 한다.

 

그러다 보니 얘기도 고행이었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며 밀려오는

일감에 치여 죽지 않음만도 다행이었고 얘기나 산모 모두 생명은

참으로 모질고 질긴 것이라 하기도 하셨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애기 낳은 지 반년도 되기 전에 또다시

임신 이였고 연년생으로 두 번째 애기는 10달도 차채우지 못하고

태어 낫지만 태어나자마자 죽고 말았다 한다.

 

이런 고된 시집살이 하면서도 불평을 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우다가 는

층층시하 웃어른들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지다 보니 잠시 앉아 쉴 여가도 없었단 다.

온 식구가 디딜방아에 매달려 쌀 한 가마 만들어 놓아 봤자

16식구의 입에는 열흘도 못 가는 판인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다.

 

누에 먹여 실을 뽑아 명주 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야 되고

메마른 밭에는 목화 심고 삼 심어 물레 돌려 실을 뽑아야 하고

삼 거두어 자갈 밭 냇가에 큰 가마 솥 올려놓고 그 위에 묶은

삼다발 가마니로 둘 둘 말아 세워 놓고 푹 삶아 익혀서 삼 껍질

벗겨 가느다랗게 여러 갈래로 쪼개고 이어서 베틀에 올려놓고

삼배를 짜고 이것을 다시 본에 대고 자르고 여름에 온 가족들이

입을 옷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한다.

 

우리 어머님은 처녀 때부터 익힌 바느질 솜씨가 특출하여 무명 옷

삼베 옷 목화 타서 넣은 어른들 겨울 한복도 척척 만들어 내다보니

동래 이웃 친척 어머님의 바늘 솜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단다.

 

요즘처럼 재봉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늘에 실을 끼워 한 올 한 올

누비며 호며 공그르며 감치고 꿰매는 바느질, 차라리 바느질 솜씨

감추고 살았다면 그래도 고생을 좀 덜 하였을 터인데 약지를 못해

이런 바느질 솜씨가 알려지다 보니 조 부모님 증조부모님 동네방네

다니면서 손자 며늘아기 바느질 솜씨 자랑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옷 만들어 줄 일감을 받아 놓고 빨리빨리 채근까지 하시니

호롱 불 밑에서 밤을 낮 삼아 일을 했다 한다.

 

한복 양복 곱게 만들어 놓게 되면 조 부모님들은 그걸 배달하고

바느질 품 삯을 받아 챙기는 재미에 증조부모 조 부모님 경쟁하듯

일감을 가져 왔으니 이놈의 바느질 솜씨가 지옥 행이었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