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게 일장춘몽 (一場春夢)이였던가
미국에 와서 사업을 다시 시작한 지 근 30년이 되었다. 사업이라기보다 농사꾼이라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한국에서 취미로 배운 분재를 가지고 분재농장을 개업해서 분재에 필수적인 화분 분재 철사 도구 등을 한국·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도매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0년 전 당시만 해도 미국 분들 분재(Bonsai)가 무엇인지도 몰라 일반 정원수 매장에만 가도 정원공사를 하며 캐다 놓은 다 죽어가던 고목의 싼 분재 소재와 지천으로 깔린 야생향나무를 채집해서 30년을 키우며 보살피다 보니 자연히 분재작품으로 변하여 골동품처럼 노다지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채집한 분재 소재는 대부분 10년 이상 개작을 거듭해야 작품으로의 모습을 드러내다 보니 10년 세월이 마치 일 년 같이 느껴져 세월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다 최근 당뇨와 부정맥으로 응급실에 몇 번 들락 그리다 보니 이제야 나도 모르게 산수(80세)가 지난 할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재원을 팔고 은퇴를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 그런지 지난 밤에는 분재원을 정리하고 모처럼 고국을 방문한 꿈을 꾸었는데 50년 전 처음으로 특허를 받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창업해서 자전거 한 대를 사서 제품 원료에다 완제품 배달 그리고 자취를 하며 피나게 고생하던 30대 일인 3역지게 사장 시절 내가 단골로 다니던 니나노 밥집을 방문한 꿈이었다. 니나노 밥집은 방산시장옆 천개천 판자촌 뒷골목 점심 밥집인데 반찬은 깍두기 김치 단무지에 불과했지만, 밥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풍족했기 때문에 당시 방산지장 일대에서 어렵게 영업을 하고 있던 분들에게는 최고 인기 식당인지라 밥값이 너무 싸 점심 한 끼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그런 집이었고 저녁에는 막걸리를 팔던 술집이었기 때문에 단골이었던 내가 니나노 밥집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집을 알게 된 것은 당시 잘 나가던 윤달수 동문 때문에 이였다. 윤동문은 국방부 군수품 납품검열관으로 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복에서부터 양말 내의 등등 섬유제품은 윤 검열관의 서명 없이 는 납품이 불가능하다 보니 군납업체로부터 로비의 손길이 수도 없이 공격해 왔지만 이런 유혹에 굴하지 않기 위해 상담 장소로 택한 곳이 큰 요정이 아니고 서민적인 니나노 집이었던 것이고 아무리 먹고 마셔보아야 큰 요정의 한 아가씨 팀값도 되지 않다 보니 그런 오해는 생기지 않아 좋다고 했다
폐일언하고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국을 방문해서 방산시장 니나노 밥집을 찾아갔지만, 천지가 개벽한 마당에 니나노 밥집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을 것이란 것은 예견했지만 현대식 상가 에 나이 드신 분이 있기에 혹시 옛날 이곳에 있었던 니나노 밥집을 아십니까? 물었더니 우리네 나이에 그 유명한 니나노 밥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소이다. 퇴계로로 이사를 해서 큰 요정을 운영하고 있지요 하면서 팸플릿을 주면서 한번 가보십시오 했다
당시 식용유 도매업을 하던 김형인 동문과 함께 단숨에 약도를 보고
요정을 찾아가니 안내 아가씨가 요정 입구에서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몇 사람인가 물었다
우리는 두 사람이지만 옛날 니나노 집 마담과 당시 함께 했던 분이 계시면 불러 달라고 했다
안내 아가씨 대답 왈 그당시 주인 마담은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지금 그분과 함께했던 분이 세 분이
계신 데 누굴 불러드릴까요? 물었다. 세분 모두 와달라고 해라 50년 전 지게 사장이 미국에서
찾아 왔다고 하면 알 것이다. 안내 아가씨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게 사장 하면서 나갔다. 당시 내가
올 때마다 커다란 짐칸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재산목록 제 일호 자가용이라 자랑하고
다녔더니 마담이 자전거를 지게로 비유해서 지어준 별명이다
몰라보게 변한 할머니 세 분이 지게 사장님! 하며
들이닥쳤다. 그러나 원래 예쁘고 인자한 미인인 데다 곱게 늙은 인상은 그대로 남아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그토록 억척같이 고생 고생하더니 결국은 성공했구려. 축하하고
반갑네 했더니 눈물을 훔치면서 세 할머니가 한꺼번에 가슴에 안기면서 한참 흐느꼈다
50년 전 동기생들과 항상 단골로 다니던 추억을 더듬어 찾아왔는데 성공한 모습을 보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네.
아닙니다. 이 업소를 인수할 때 무리하게 사채를 쓰는 바람에
다음 달이면 이 업소도 사채업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사채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며 푸념을 널어놓았다.
몇 백만 원이 천만 원이 되고 금방 수억대의 족쇄가
도어 버렸습니다. 다음 달까지 원금을 갚지 않으면 압류 절차 밟겠다는 통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할메들 성실성과 끈기를 내가 아는지라 나는 불쑥 이런 제안을 하였다
아이고, 저런 50년을 하루같이 고생하면서 일군 업소인데 악덕 사채업소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수는 없지 그 사채 내가 갚아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이보게들 내가 언제 실없는 말을 한적 있던가요.
이런 고마울 때가 있나
사채업자에게 넘기는 것보다 지게 사장님에게 넘어간다면야 우리로서는 대환영이지요.
했다. 아닙니다.
업소를 넘기라는 것이 아니고 아무 조건 없이 사채를 내가 대신 갚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이라면 원금을 형편이 되는 대로 꼭 갚으시고 이자는 법정이자만 편리한 대로 차명 계좌를 만들어 입금해 두었다가 인신매매로 몸값이란 족쇄가 채워져 노예처럼 팔려 다니는 아가씨가 있거든 그 몸값을 대신 갚아 드리고 이곳 종업원으로 일을 시키던 결혼을 하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던 본인의 뜻에 따라 선택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했다 꿈이었지만 내가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30대 술집에 다니면서 (지금은 술을 끊은 지 오래지만 )서울만 가면 길이 있을 것이란 헛된 꿈을 안고 무작정 가출해서 인신매매 조직의 밥이 된 아가씨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훗날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이런 사람들을 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생각이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꿈에 다시 나타난 것 같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백골난망이올시다 감격해 하는 장면은 외면한 채 윤달수 사장님 소식 알고 있겠지요? 하고 물었다. 그럼요 은퇴해서 지금은 안양에 계시는데 가끔 들리곤 하지요. 연락해서 내가 만나자고 한다고 약속을 잡아주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했다.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김형인 동문이 입을 열었다. 만나려면 윤 동문만 만날 것이 아니라 자네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화공과 8기 동문 모두 모이기로 함세. 했다. 지금은 대부분 준재벌이 되어 망중한을 즐기고 있지만, 니나노 밥집을 모르는 동문은 없을 것이니 이 집 영업에도 도움이 될 걸세
동문에게는 내가 연락을 하지 했다 만날 날짜를 잡다 말고 잠을 깨어 버렸다 모처럼 동문 만날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던 것보다 젊은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꿈이었는데 이런 꿈을 남가지몽 일장춘몽(南柯之夢一場春夢)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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