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적부터 되살아난 기억의 조각들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의 품에서 자라다 성인이 되고 노년기를 거처 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의 긴 여정을 걸어오는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험과 사건들을 모두 다 기억해 낸다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 모든 기억을 잠재의식 속에 저장해 두긴 했어도 대부분 잊어버리고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수천 아니 수만 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 가며 후손들을 위해 기록으로 남겨 놓고 보니 몇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원고는 이미 탈고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 살아오는 동안 좋은 일 궂은일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중심으로 남겨놓은 글에 불과 한 것이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기억의 조각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극을 받아 잠재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줄줄이 의식 속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생후 최초의 기억
사람이 태어난 후 최초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몇 살 때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한국 나이로 산수 (팔순) 가 되도록 잊히지 않고 남아있는 때는 3살 적 기억이다. 나에게는 바로 아래로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태어나고 얼마 안 가 죽고 말았지만 나는 이 쌍둥이가 태어날 때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님은 내가 3살 때 쌍둥이 동생이 태어났다고 했다 쌍둥이가 안방에서 태어나고 할머니가 큰 다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듯한 물에 목욕을 시키고 있었는데 내기 할머니에게 왜 아기가 둘인가? 물은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는 엄마가 낳았고 하나는 할매가 낳은 아기란다 라고 그러나 왜 그 이전의 기억은 없을까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3살 이전의 기억은 모두 망각하게 되어 있고 이것을 유아 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이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아름다움이란
3살 때인가? 4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기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실 수양버들이었다. 엄마랑 이모랑 도시락을 싸서 어느 호숫가로 소풍을 간 모양인데 호숫가로 죽 실 수양버들 나무가 심겨 있고 연두색 수양버들 새싹들이 막 움을 트고 그 가지들이 모두 땅에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은 정말 정말 아름답게 느껴져 나는 그 가지들 사이를 혼자 뛰어다닌 기억은 난생 최초의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모습을 먼저 본 것이다
*최초로 느낀 아빠의 사랑
내가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은 경남 김해 주촌면 천곡 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니만 별도로 김해 읍에 방이 있는 가게를 두고 건어물 장사를 하고 계실 때이다.
부모님은 대부분 가게에서 머물고 계셨는데 어린 나를 데리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이긴 해도 이때의 기억들은 많이 남아있다. 제일 인상 깊었던 모습은 나무꾼들의 나무장사 전경이었다. 먼 산에 가서 죽은 나뭇가지, 장작 겨울철에는 소나무 잎 (갈비)을 갈고리로 긁어모아 지개에 한 집씩 해서 한 줄로 죽 세워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 어머님도 땔 깜이 떨어질 때마다 이 나무꾼의 나무를 사시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장사하다 보니 자전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교통수단으로 사용하시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나를 뒤에 태우고 고개를 넘고 내리막길을 가다 고만 브레이크 고장을 일으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 일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도 많이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으니 부둥켜안고 지혈시키기에만 정성을 다하실 때 처음으로 아빠가 나를 무척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4~5살 때의 소꿉놀이 친구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나에게는 유일한 이웃 가겟집 소꿉친구 영희라는 동갑내기 계집아이가 있었고 당시 부모님들은 이름 끝 자만 부르곤 했는데 영희, 병희 둘 다 끝 자는 “희”가 데다 보니 희야! 하고 부를라치면 똑같이 “예!”하고 대답하곤 했다 이 꼬마 영희도 지금쯤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
*엉터리 야학교와 놋다리
그러다 5살이 되고부터는 손 곱 친구와도 헤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천곡리 본가로 돌아가 야학교에 (이름으로 보면 야간 학교라는 뜻이지만 야간 학교는 아니었다. 지금의 유치원?)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었던 교실 한 개짜리 이 사설 야학교라는 것이 참으로 엉터리였다. 나같이 5살 꼬맹이에서부터 초등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9~10살이나 되는 아이들은 말할 것 없고 금방 온 학생과 1~2년 이상 다닌 학생까지 모두 한방에 몰아넣어 놓고 일본 책을 읽어주면 따라 잃게 하는 것인데 이직 일본글자도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책을 보고 따라 잃으라 하고 있었으니 수업시간이 지루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아침에 야학에 간다며 책보자기 싸매고 나왔다가 이웃 친구랑 놀다가 학교 파는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런 아이를 “놋다리”라 했다 후에 부모에게 내가 놋다리라는 것이 들통이 나서 종아리를 맞고 야학을 고만둔 일도 있었다.
*그림 같은 코스모스 동산
그 후 8살에야 주촌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 첫날 시게미쓰라는 담임선생이 일본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 해서 내기 손을 들고 지명을 받아 일본노래를 멋지게 열창한 기억이 있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학교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호수 가운데 둥그런 섬이 하나 있고 가을만 되면 섬 전체가 코스모스 꽃으로 뒤덮인 정말 아름다운 장관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나타나곤 한다.
*최초로 구경한 피겨 스케이팅
한겨울 호수가 꽁꽁 얼어 있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전경에 넋을 잃고 있었던 것도 잊히지 않는다. 요즘 말하는 피겨 스케이팅을 본 것이다 젊은 청년(일본인?)이 몸에 찰싹 달라붙은 내의 같은 까만 옷을 입고 코스모스 동산이었던 섬 둘레를 순식간에 빙빙 미끄러지며 돌다가 묘기를 부리는 모습은 정말 보는 사람을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고구마 밭
당시 학교의 넓은 운동장은 고구마 밭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종말이 가까워 오면서 미국의 B29 공습을 피하고자 학교 운동장을 밭으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がんばれ (간바레) 힘내라
왜정시대에는 산 계곡 물이 흐르는 곳마다 계곡에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곤 했는데 이 때 둑을 쌓기 위한 주민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동원되곤 했다 커다란 원통형 나무 위에 정(井)자형 손잡이를 고정하고 사방에서 학생들 여러 명이 들어 올렸다 내리치며 둑을 따지고 있었는데 당시 몸이 뚱보라서 양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인 교장 선생도 땅 따지기에 동참했다. 이에 학생들은 모두 “양돼지 간바래!” 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이 일본인 교장 선생은 한국말인 양돼지가 자기 별명인 줄도 모르고 간바래라는 소리만 알아듣고 합창을 했다. 학생들 양돼지 간바래(양돼지 힘내라) 쿵 하면 후렴으로 교장 선생은 간바래!(힘내라) 쿵 하곤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때가 1944년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8세 때의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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