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가족 이야기

용돈 문화

benny kim 2015. 4. 29. 07:55

용돈 문화

성수 결혼식 가족모임.jpg

 

옛날에는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 모시고 친인척 어른을 방문해서 세배도 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용돈도 드리곤 했다.

이게 혈육의 끈끈한 정을 이어온 우리 조상님 들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는데

시대가 바뀌고 손바닥에 스마트 폰 올려놓고 지구촌 반대쪽 사람과도 얼굴

맛보면서 웃고 울고 수다를 떠는 세대에게는 명절날 어르신 방문해서

세배하고 용돈 드린다는 이런 거야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쯤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우리네 노친들은 세배받고 세뱃돈

주는 줄로만 알았지 용돈 받아볼 생각은 접고 살아온 지 오래다

 

며칠 전에는 명절은 아니었지만, 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여 모처럼 가족의 정을

나누었던 일이 있었다.

미국에 사는 막내 누이동생 아들이 모국의 착한 색시 만나 조국의 일가친척들

축하를 받으며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손위 오빠네 집에서 푸짐한 가족

파티를 연 것이었다.

SNS 문화 덕분으로 나처럼 미국에 살면서 직접 참석 하지 못한 가족들은

Face Book 열어놓고 동영상 보며 함께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

아쉽기는 하더라도 세월이 흘러 집안 어른 자리 쾌차고 앉은 덕분인지

전화로나마 일일이 인사를 받고 보니 모처럼 명절을 만난 기분이었다.

 

인사라는 것이 오빠, 삼촌,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말을

수십 번을 듣다 보니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아, 내가 이제 갈 때가 가까워진

게로구나 실감이 났지만, 모국을 떠나 오래 살다 보니 모두 잊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한결같이 잊지 않고 있는 우리 가족들이

고맙고 감사하기만 했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용돈

막냇동생이 아들 결혼식 잘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동생이 사촌 여동생 미자가 전해 달라며 받아왔다면서 내게 용돈으로

거금 $300을 전해 주었다.

아니 미자가 넉넉한 살림이 아닐 텐데 내가 보태 주어야 할 참에 왜

이런 돈을 받아 오는가 하며 나무랐지만, 오빠 왜 내가 그걸 모르겠어요.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어요.

오빠에게 입은 은혜에 대한 작을 마음을 전해 주고 싶은 것이니 제발 좀 전해

달라는 부탁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평생에 처음 받아보는 용돈이고 미자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그래도 오손도손 착한 신랑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막상 미자로부터 옛일을 잊지 않고 있다는

그 마음을 받고 보니 나도 눈시울이 적셔 젖고

양일, 미자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 주며 행복하게 해준 조카사위

박 서방 이 서방이 고맙기만 했다

미자는 아버님 5형제 중 셋째 삼촌의 막내딸이다.

삼촌은 아버님 5형제 중 유일하게 일찍 돌아가시고 불행했던 가족이다.

삼촌에게는 병조, 양일, 기조, 병식, 미자 32녀의 다복한 가정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부모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큰아들 병조가

6.25 전쟁 후 몰아친 전염병 콜레라의 희생물이 되어 죽어 버렸고

연이어 숙모님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삼촌은 실의에 빠져 괴로움을 달래느라

술을 과음한 탓으로 알코올성 간 경화로 돌아가시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자녀들만 남겨 놓고 가족들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에 어린 자녀들은 삼촌들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살아야 했으니 어린 꼬마들이 흘린 눈물을 다 모으면 개울이 되었을 것이다

 

참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항상 착하고 불쌍한 4남매 사촌 동생을 특별히

사랑하며 말로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뿐 나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생이었으니 마음뿐이었다

 

참으로 아직도 죄인처럼 잊히지 않은 것은 내가 대학재학 시절

어느 회사 사장님의 댁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기조가

김해에서 서울로 불쑥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축농증이 심해

심각한 상태였고 눈, 코 귀까지 아파 잠도 자지 못해 견디기

힘든 상태였다

서울 가면 고칠 수 있는 큰 병원이 있다는 말만 믿고 나를

찾아온 것이지만 나 역시 가정교사로 학비 벌어 가며

공부하고 있는 처지에 큰 병원에 갈 형편은 못되고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친척 되는 이비인후과 개인 병원에

갔더니 코안 전체가 망가져 가고 있으니

빨리 큰 병원에 가서 수술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가정교사로 있는 댁에 한 달 가까이 데리고 있다 보니

주인댁에 면목도 없고 입원시킬 형편도 아니었으니 간신히

기차 비 마련해서 아버지 삼촌들에게 드리는

의사의 진단서 첨부한 편지를 맡기면서

이 편지 전해주면 삼촌들이 도와줄 것이라 하며 내려보냈던 것인데

그 길로 내려가 아픈 고통을 견디다 못해 농약을 먹고

자살해 버린 것이었으니 마치 내가 죽인 것 같은

죄책감은 아직도 남아 있다

 

기조는 그렇게 가고 그의 동생 병식이 역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니 못한 병식 이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모진 고생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오가다. 같은 처지의 색시를 만나 아들딸 남매를

낳고 열심히 살았는데 막노동판에서도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때마다 내가 보호자로 보증을 서주어 그나마 벽돌

찍어 내는 기술 하나로 어려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인데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한다는 소식에 가장 슬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형님이 이민을 가고 나면 날 보증 서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이제 누구에게 의지하고 삽니까. 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병식이었다

 

그 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이 역시 사고가 아니라

남은 두 자식에게 보상금이라도 받게 하려고

교통사고로 위장한 자잘 이였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기도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고아처럼 자란 두 자녀는

조상의 돌보심 이였는지 혈육을 이어가며 모두

성실하게 잘살아 가고 있다는 소식에 위안을 받고 있다

이래저래 오빠들 다 보내고 양일 미자 오누이 단둘이 남았던 것인데

모진 풍파 다 겪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착하게 살아왔는지 기특하기만 하였다

 

지금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좋은 배우자 만나 자식들 낳고 참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번에 용돈을 보내준 막내둥이 미자 이야기이다

 

미자는 삼촌 댁에서 가사일 도우며 자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내가 미자를 데리고 와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든 것인데 아직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베풀면서 살아온 80평생인데 처음 받아보는

용돈 $300 이 거금으로만 느껴져 가슴이 벅차오른다.

액면으로만 본다면 우리네 나이에 큰돈이라 말할 수 없을 열지 모르겠지만

세배와 용돈에 대한 우리의 문화유산에 숨어 있는 정신을 생각한다면

그 값어치는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돈의 가치란 액면 그대로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재벌들에게 1~2백 불은 페니로 느낄지 모르지만 어려운 분들에게는 1불도

몇백 불로 느껴 지는 게 돈의 가치인 것이다

용돈 문화란 어떤 것인가? 우리 민족은

아무리 가난에 찌들고 초근목피로 어렵게 살았어도 자식 위한

사랑과 희생은 어느 민족보다 강하고 위대한 민족이었다.

옛말에 부모님들 세상 제일보기 좋아하는 것은 내 논에 물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진자리 마른자리 가라 뉘어 가며 키워준 그 큰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성인이 되고 나서 명절이면 세배

하고 용돈 챙겨 드리곤 했다

은혜를 잊지 않는 마음의 표시 이게 바로 용돈 문화 인 것이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불이 넘고 선진국 반열에 서서 의식주

걱정해 보지도 못한 세대들 누구 덕에 잘 사는지조차 모르고

부모 할아버지 세대를 비롯한 국가와 사회가 베풀어 준 그

은혜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단 이기주의에 휩쓸러 다니는

현실을 보다 말고 이런 용돈 문화를 접하게

되니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미자가 오빠의 작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 돈이지만

내 어찌 용돈으로 써 버릴 수가 있겠는가.

미자야 보내준 용돈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 문화가 되살아

날 수 있게 보람된 곳에 쓰도록 할 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