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가족 이야기

누이동생 얼굴에 떠오르는 어머님의 모습

benny kim 2008. 7. 22. 05:30

 

약60 년 전이니까 요즘 세상비교하면 참 격세지감이 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도시로 유학 가서 자취하며 공부하던 때이다

당시만 해도 김해와 부산은 부산과 서울만큼 먼 곳이다

 

버스도 하루에 한번 정도 그나마 비포장도로 꼬불꼬불 가다 보면

버스가 얼마나 고물이 이었던지 먼지가 차안으로 들어 와 승객의

얼굴을 온통 번지 분으로 화장을 해도 불평은커녕 쌀 포대 들고 다니는

나 같은 학생 태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이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토요일 집에 들리. 곤했다

한 달 먹을 쌀을 갖고 오기 위해서였다

 

일요일 아침부터 떠날 준비를 하다 보면 쌀 한 포대는 기본이고

우리 어머니는 봉지 봉지 밑반찬 만들어 싸서 주지지만 그걸

가져가는 것이 여간 곤욕 서럽지가 않았다

고추 마늘 깻잎 장조림 등 에다 유리병에 김치 담아 주시시지만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플라스틱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문지로

겹겹이 싼 다해도 조림 물기가 새어나와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져가지 않겠다하고 하지만 한사코 버스정유소 까지

갖고 나오시는 어머님의 정성에 못 이겨 가져 오곤 했다

 

사실 버스간이라 하지만 시골집에서 김해 버스 정유소까지는

10리 (4KM)가 넘는 거리이다

이 길을 어머님은 이고지고 날라다 주셨다

52세 때 혼자되시고 6년 전 94세 로 돌아가실 때까지 대부분 6남매

중에 3째인 이 사람이 모시고 있으면서도 마냥 어머님과 함께

하신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즐거웠던 이유는 유별나게 어머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면 다시 어린애가 된다더니 이 사람도 고희를 넘기고 자식들

다 독립하고 혼자 외롭게 살다보니 요즘 따라 애기가 되어

어머님생각이 간절해진다.

 

이렇게 어머님 생각이 나면 50대 초반의 막내 여동생 집에 들르곤 한다.

막내 여동생은 어머님이 40이 넘어 얻은 딸 이였는데 이놈은 낳고

어머님은 만년에 주책도 없이 생겨 낳긴 했지만 이놈 시집보낼 때까지

살기나 하려나 하시던 어머님 이셨는데 그 딸의 막내딸 (외손녀) 까지

수발하면서 만년에는 막내 집에서 살기도 했던 분이시다

 

이외손녀는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영어 보다 한국말을 먼저 배워

지금 12학년(고삼)인 어린 나인인데도 통역사로 이리 저리

불려 달리는 재주꾼이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후 몇 년 동안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할머니가 생전에 계시던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옷장 문을 열어 본곤 했는데 엄마가

그 방에 왜 매일 들리느냐 하면 엄마 여기에 할머니 냄새가 있어

하며 할머니 이야기만 하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결성 해진다

이놈의 이런 모습에서도 인자하시고 다정하셨던 어머님의

성품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이 막내 동생에 가면 옛날의

어머님 모습을 그대로 느끼고 보게 된다.

내가 대학을 나와 사업을 하고 있을 때 막내 동생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비는 내가 대부분 대어 주다 보니 이 동생도

그걸 잊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학비를 송금해주시던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런지 내가 동생네 가면 옛날 어머님이 반기시던 그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되는 것이고 하로 밤 자고 떠날 때는 내가 자취 하며

집에 들렀다 떠날 때의 어머님의 그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된다.

떠날 때를 대비해서 가지가지밑반찬 에 간단하게 오븐에 넣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해서 봉지 봉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준다.

나 혼자 이 많은 음식 다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

차에 싫어 놓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머님의 모습그대로이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동생의 얼굴에 어머님 의 모습이 오버 랩 되어

떠오르니 새삼 서래 어머님이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대기만성이라더니 이제야 철이 드는 걸까

좀 더 잘해 드릴걸. 철들면 뭣하나 평생에 고처 못할 일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