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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시 78곡

benny kim 2012. 1. 8. 00:36

향 수 (정 지용 )- 박인수 이동원노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 재가 식어 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달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

가을의 기도 (김 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 영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2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찬란한 슬픔의 봄을

끝없는 강물이 흐 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 르네

돈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뻔질 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인 듯

마음이 도론 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이 어린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 르네

떠나가는 배 (박 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아늑한 이 항구-ㄴ 들 손쉽게야 버릴 거나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는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밭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가-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 3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야 간다

가는 길 (김 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져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압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팔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 입니까 4

님 의 침묵 (한 용운 1926)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 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의 정수 박이에 들어 부었 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 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밑습 니다 아아 님은 갔지 마는 나는 님 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제 곡조로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 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의 능금처럼 붉어질때

그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위에는 이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님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마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5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차츰 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 이었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 하는 애기의 잠 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 읍니까

나의 침실로 (이 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 도다

아,너도 먼동이 트기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어느덧 첫닭이 울고-뭇 개가 짓도다 나의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마음의 촛불을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얄 푸른 연기로 꺼지려는 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가까이오도다

아, 행여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 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내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 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도 나는 미치고 말았 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금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 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내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 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하고 어둔 밤물결도 잦아 지려는 도다 6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1947)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피우기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어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내 마음은 (김 동명 1937)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 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그대의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라.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7

나는달아래에귀를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 오리라

내 마음은 낙엽 이오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라

세월이 가면 (박 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에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8

서 시 (하늘과 바람과 별) (윤 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

귀 촉 도 (서 정주 1943)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이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울음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양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 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님아 9

귀 천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 놀다가 구름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 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깃 발 (유 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10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행 복 (유치환 1954)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이다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나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언언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이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이어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 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 하였네다

청 포 도 (이 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11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구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 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너를 위하여 (김 남조 )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위하여 나살거니

소중한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랑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12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 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 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은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 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을 아실 이 (김 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13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혼자 마음을

진달래꽃 (김소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라 가신 길에 뿌리오리라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 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 오리라

파 도 (신 경림)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로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로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간다

바람에 몰래 개펄에 내 팽개쳐치고

배다리 에서도 육지에 매달리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너머

그 먼곳 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14

모두가 하양 파도가 되어간다

갈 대 (신 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다

그건어는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목계 장터 (신 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터

아흐레 나흘 찾아가 박가분 따는

가을볕도 서러운 박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뭍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끊어 넘는 토방 뒷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15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나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김 종삼)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와 재롱부릴지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제에 반짝이곤 한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사람이다

나룻배와 행인 (한 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앝으나 급한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쬐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까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16

우리가 물이 되어 (강 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설 야 (김 광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지고 17

내 홀로 밥 깊어 뜰에 내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밭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기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서리다

겨울 바다 (김 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18

바다와 나비 (김 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 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날개가 물결에 저려서

공주처럼 지쳐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산 유 화 (김 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진달래꽃 (김 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오리라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19

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 오리라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라

초 혼 (김 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켜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20

눈 물 (김 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나 그 네 (박 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동 천 (서 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21

바 위 (유 치환)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또 다른 고향 (윤 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22

백골 몰래

아름다운 다른 고향에 가자

자 화 상 (윤 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한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 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참 회 록 (윤 동 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23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거 울 (이 상)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 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요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거울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내 악수를 받을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요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속의 나를 만져보지 못하는 구료 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아직 거울을 안 가졌소 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의외로 된 사업에 골몰 할께요

거울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 할수 없으니 퍽 섭섭하여

광 야 ( 이 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24

(이 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문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때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져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이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절 정 (이 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잠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 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교 목 (이 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에 뉘우침 아니라 25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승 무 (조 치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 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랴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1936)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26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그리움 (이 용 악)

눈이 오는가 북쪽에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 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27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봄은 고양이로다 (이 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 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 놀아라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 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28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여 승 (백 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같이 떨어진날이있었다

고 향 (백 석)

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친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정주라는 곳이라 한다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 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29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김 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흔들리며 피는 꽃 (도 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30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박 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김 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빗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31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설 일 (김 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 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32

무 등 을 보며 (서 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대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을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아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둘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날이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33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매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라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박 두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한 침묵

꽃으로 수장하는 내일에의 날갯짓.

아,홍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떼 비둘기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수가 없어

강으로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이 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34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와 같이 구름뒤 에서 반답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기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 는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 다

그러나 지금은 -들은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 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 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때에, 쏟아지는 눈물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35

하고 능욕 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민들레의 영토 (이 해인)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꽃아 놓은

사랑은 단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훨훨 타다 남은 저녁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36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물 망 초 (이 해인)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아달라고

나를 잊어선 안 된다고

차마 소리 내어

부탁하질 못하겠어요

죽는 날까지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내가 먼저 약속하는 일이

더 행복해요

당신을 기억하는

생의 모든 순간이

모두가다

꽃으로 필거에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백 목 련 (이 해인)

꼭 닫혀 있던 문이기에

더욱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리네

침묵속에 키워둔말

처음으로 꽃피우며

하늘보는 기쁨이여

누구라도 사랑하고 37

누구라도 용서하는

어진 눈빛의 여인

미운껍질을 깨듯

부질없는 욕심을 밀어내고

눈부신 아름다움도

겸허히 다스리며

서있는 모습그대로

한 송이 시가 되는 백목련

예수아기 안은 성모처럼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늘을 탐내

모든 이를 오라 하네

생의 감각 (김 광림)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독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아침 이미지 (박 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38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며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직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종 소 리 (박 남수)

나는 떠난다 .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인종은 끝이 나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에 실리어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별 혜는 밤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39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패,경,옥이런이국소녀들의 이름과,벌써 아기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란시스잼“라이너 마리아릴케,이런

시인의 이름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아슬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사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40

목마와 숙녀 (박 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져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져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 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한다

...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져 간직한 폐시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41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생명의 서 일장 (유 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 와 내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일 월 (유 치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을 그대로

성신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옮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42

두 동공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에

또한 무슨 희안 인들 남길소냐

슬픔이 기쁨에게 (정 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든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지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찬 송 (유 치환)

님이여,당신은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사랑이여 아침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당신은 의가 무거웁고,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43

님이여,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십시오

님이여,사랑이여,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조그만 사랑 노래 (황 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밝혀있다

사랑한다,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않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황 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때어내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44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고 은)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청 노루 (박 목월)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름나무

속잎 피는 열두 굽이를

청 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낙 화 (조 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45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뭍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을

울고 싶어라

엄마야 누나야 (김 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사 슴 (노 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젊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46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산에 언덕에 (신 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다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 지어이

사랑하는 까닭 (한 용운 1926)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한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새로운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건너서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낙 화 (조 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 영랑)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님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것네 48

하 늘 (박 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스한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난 초 (이 병기)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주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산이 날 에워싸고 (박 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49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산 너머 남촌에는 (김 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은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갈이 저리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 Ep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느란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50

윤 사 월 (박 목월)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 사월 해 길다

꽤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 듣고 있다

파 초 (김 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내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51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폭폭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사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갓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 옹배기에 북덕불 이라도 담겨 오면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게를 하고 굴기도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끼일 적이며,

또 네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52

나는 내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수밖에없는 것을느끼는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나를 마음대로 굴러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한탄이며,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하는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가며,무릎을 끓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낙 화 (이 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람은 자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은

가을을 향하여 53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 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 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저녁 눈 (박 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울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붐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 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농 무 (신 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54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꾕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 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 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 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쳐박혀 발버등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먼 후일 (김 소월1925)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55

시인이 좋아하는 애송시,명시목록

1,꽃 (김 춘수) 2,서시(하늘과 바람과별 윤 동주)

3,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4,자화상 (서 정주)

5,낙 화 (이 형기) 6,님의 침묵(한 용운)

7,동천 (서 정주) 8,진달래꽃 (김 소월)

9,풀 (김 수영) 10,향수(정 지용)

11,울음이타는 가을강(박 재삼) 12,나의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13,북치는 소년 (김 종삼) 14,나그네 I박 목월)

15,빈집 (기 형도) 16,사평역 에서 (박 재구)

17,초혼 (김 소월) 18,모란이 피기까지는 (김 영랑)

19,국화 옆에서 (서 정주) 20,즐거운 편지 (황 동규)

21,산유화 (김 소월) 22,별헤는 밤 (윤 동주)

23,여승 (백석) 24,유리창 (정 지용)

25,광야 (이 육사) 26,무등을 보며 (서 정주)

27,저녁놀 (박 용래) 28,산정묘지1 (조 정권)

29,거울 (이상) 30,흰 바람 벽이있어 (백석)

31,백록담 (정 지용) 32,자화상 ( 윤 동주)

33,절정 (이 육사) 34,그리움 (유 치환)

35,윤사월 (박 목월) 36,사랑의 변주곡 (김 수영)

37,눈 (김수영) 38, 푸르는 날 (서 정주)

39,귀촉도 (서정주) 40,화사 (서 정주)

41,귀천 (천상병) 42,눈물 (김 현승)

43,농무 (신경림) 44,우리가 물이 되어 (강 은교)

45, 풀 (김종해) 46,죽관 (서 성춘)

47,남해금산 (서성복)

보리피리 (한 하운1953)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늴리리 56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늴리리

즐거운 편지 (황 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밑는다

유 리 창1 (정 지용1934)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 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나

길들은 양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자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서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김 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57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북치는 소년 (김 종삼)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 깨비처럼

자 화 상 (서 정주)

애비는 종이었다.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싸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도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무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58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는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화 사 (서 정주)

마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저리도 징그러운 몸둥이라냐

꽃대님 같다

나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 뜯어라,원통이 물어 띁어.

달아나거라,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녹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기쁜 숨결이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래오파트라의 피 먹는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사 평 역 에서 (곽 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서린 유리창마다 59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듯

한 두름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눈 물 (김 현승1957)

더러는

옥토에 덜어지는 작은 생명이 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60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낙 엽 (구르몽 프랑스 시인)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낙엽 빗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있다

시몬, 나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나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미라 보 다리 (불,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 들의 사랑도 흘러 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은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다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발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61

영원한 눈 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미- 영국)

노랗게 물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슷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혀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62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놓은 것입니다 라고

산문에 기대어 (송 수권 1975)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잔은 막시고 한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봇물 속에 비쳐 옴을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1974)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63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빨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은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 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자

내가 한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줄 알았다 64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 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건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65

남해 금산 (이 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들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바람의 말 (마 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66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봄 바다 (김 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 설랑 67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송 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띠우고 둘러 앉을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여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꺼지지 않는

생명의 서 (유 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이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68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이라

박 꽃 (신 대철 )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별들은 따뜻하다 (정 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 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69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 선우)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별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이 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빝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70

산정묘지1 (조 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계곡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 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라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 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다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1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속에서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는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71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씨앗 몇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옆 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72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청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비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자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핏줄은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물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자의 불멸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복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 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73

출처 : 세종시를 위하여 바칩니다.
글쓴이 : 정태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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